박완서 작가의 노란집을 사러 들어간 서점. 그의 노란집 옆에 가지런한 자태를 뽐내며 초록색의 언덕들이 시선을 잡아끄는 책이 있었다. 다음 문장이 궁금해 처음 몇장을 빠르게 읽어삼키며 호기심에 구매한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후두암에 걸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써내려 갔다는 레이철 조이스의 이 첫 장편소설은 주인공인 해럴드를 통하여 독자들 각각 그들의 지나온 일생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마력을 품고 있다.
매끄러운 스토리전개와 중간중간에 이어지는 해럴드의 감정과 신체의 기복과 그의 리듬이 글의 긴장감을 도우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예기치 못한 일은 항상 평범한 순간에 찾아온다.
옛 친구에게 전달할 짧은 편지가 80일이 넘는 긴 여행으로 변이했고 길에서 만난 수 많은 사람들을 통해 해럴드는 세상을 통해 자신을 만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해럴드와 함께 여행했다. 나 역시도 그 중의 하나였고 나도 그를 통해 나를 만나며 지나간 나날을 더듬으며 웃다울다 그 자리를 같이 걸었다.
모린이 창에서 레이스커튼을 걷어낼 때 방 안으로 뛰어들던 찰나의 햇빛을 상상한다. 그녀의 미묘하지만 확고했던 심경의 변화, 별다른 묘사없이 자주 등장하던 하얀 레이스커튼, 그 변화의 크기는 그녀의 생각의 시간 이상이었다.
해럴드의 보트슈즈가 파란색테이프로 발과 하나가 될 때는 내 피부도 동시에 예민해지며 쓰라렸다. 의리의 보트슈즈. 걷기에 더 좋은 신발로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무언가 가슴으로 큰 결정을 한다는 것은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모린과 해럴드의 챕터를 읽으며 뭉클함을 짓누르고자 머리를 들었다. 익숙한 전동차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회색의 풍경이 보였다. 나도 어서 저 회색의 가지들을 걷어내야 할텐데,
용기없는 결정은 어디 언저리에서 빙빙돌며 헤메고 있고 약하디 약한 내 몸덩어리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박혀 뿌리의 일부분만 꼼지락대고 있다. 가슴의 결정은 아직이다.
읽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뉴캐슬에서 헥섬을 거쳐 버윅어폰트위드로, 여행초기의 약속을 지키고자 우회의 길을 택한 해럴드의 마지막 고개였다. 기운 없는 다리를 끌고 휘청거리다 쓰러지기 일보직전에 있는 그를 보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반드시 쿼니를 볼 것이라는 깊은 응원이 저 아래에서 밀려나와 책의 다음 페이지를 여는 손가락에 힘을 실어주곤 했다. 지칠대로 지쳐버린 해럴드의 모습을 머리속에 그려보며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함께 걷다보니 어느새 책의 마지막 장에 가까워 왔고 책이 끝날 때는 그 끝을 독자에게 돌려주는 것 같았다. 여태 걸어온 인생의 길을 무심히 돌려주는 그런 책이다. 어느새 길의 다발을 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그런 고마운 책이다.
[2013년 11월, 반디앤루니스 좋은 서평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