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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ttEr & SweeT

피아노

 

십년 가까이 피아노를 쳤었다. 레슨이 끝나면, 선생님이 주신 과제는 언제나 늘 산더미였다.

그때는 왜 그랬었는지 피아노 연습이 너무나 싫어서 항상 뒤로 미루어 놓기 일쑤였다. 다른 숙제는 꼬박꼬박 해내더라도 피아노는 '나중에 해야지',라며 

어릴 때 부터 체구가 무척이나 작았던 편이라 고사리 같은 손으로 건반을 누르는 건 항상 힘에 부쳤고 책을 한 권씩 뗄 때마다 만족감을 느끼기는 커녕 더욱 많아질 과제량에 짜증이 삐죽삐죽 솟아올랐었다.

나보다 서너배는 커보이던 피아노 선생님이 오실 시간이면 이삼십분 가량 연습하다 과제노트에 대강 다 했다는 동그라미를 마구 그려넣곤 했다.

'유혜영 연습도 다 안 하고 방금 동그라미만 다 쳤대요!'

언니의 고자질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날 항상 믿어주시며 빙글 웃음과 함께 말씀하시곤 했다.

'열심히 쳤으면 다 끝낼 수도 있지. 자, 레슨 시작하자'


어느 이사하던 날, 피아노는 그렇게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피아노 앞에서 쩔쩔매며 혼나는 내 모습도, 가끔 조율하러 오시는 피아노 아저씨도, 그리고 선생님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이제는 나 손톱도 기를 수 있고 선생님 앞에서 틀릴까봐 마음 졸이는 일도 없겠구나, 라며 내심 무척이나 홀가분 했었다.

뉴에이지와 재즈를 좋아하기 시작하며

이젠 악보를 보기 조차 힘든 내 자신을 보며 후회가 밀려드는 이유는 '그때 조금 더 열심히 할걸' 과 같은 감정은 아니다.
변명일지 몰라도 그 당시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어떠한 자극제 같은 것.

어린 꼬마에게는 그것이 필요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