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채기가 나야만 한다면 손끝만은 아니었음 좋겠다. 저 밑에서부터 찾아오는 이 못난 감정이 제발 손끝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너무 초라해져버리고 우둔해보일까봐 말할 수 없지만
이런식으로라도 글로 끄적여댄다면 소용돌이 쳐대는 지친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잦아들까.
그는 아픈 사람이다. 손 끝이 아픈 사람이다. 닿을 듯이 닿지 않는 그는 상처같은 사람이다. 무릎에 올려져 있는 책의 다음문장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결국 책표지를 보게 만드는 그런 미운 사람.
햇살은 따사롭지만 하늘을 빤히 쳐다볼 순 없다. 내 안에 기운은 따듯하지만 그와 같은 마음으로 그를 볼 수가 없다.
이따금씩 내게 쥐어주는 그의 단어들이 내 기억의 곳간에 차곡차곡 쌓여가다 어느 순간 우르르, 하고 처참하게 무너져 버린다.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그 허전하고 텅빈 곳간에 말이다.
우르르, 하고 천천히 소리없이. 처참하고 더할 나위없이 진부하게 다시 우르르.